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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얀 떡살위에 새겨진 민초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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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영희 2012. 10. 1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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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살은 가슴 속 염원을 새기는 틀"
떡살 명장 김규석

▲ "떡살은 그냥 무늬가 아니라 편지였어요." 떡에 꼭꼭 눌렀던 무늬마다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들어있다고 풀이하는 사람, 떡살 명장 김규석씨다.
ⓒ 최성욱

국적불명의 풍속이라는 지탄 속에서도 초콜릿 과자들이 대량 유통되는 날이 있다. 다분히 분위기에 편승하는 측면도 있겠으나 달콤한 과자를 핑계 삼아 전하고픈 마음 한 자락이 '무슨무슨 데이'들을 먹여 살리는 근원이리라.
그런데 이처럼 먹을거리에 마음을 담아내는 풍속이 이 시대에 급조된 것일까. 사실 초콜릿과자를 주고받을 때처럼 따로 편지조차 써넣을 필요 없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한 메신저 음식이 우리에게 있었다. 무늬를 찍어야 완성되는 떡, 절편이야말로 만드는 이의 염원을 담은 최고의 메신저 음식이었다.  

떡에 꼭꼭 눌렀던 무늬마다에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서툰 한글로 '학교'라고 새긴 떡살 보신 적 있으세요? 자동차 모양을 그리고는 그 옆에 자동차라고 써넣은 떡살도 있습니다.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고 그냥 눌러 떡을 뺀 민무늬 떡살도 있어요. 학교 떡살은 너무 학교에 가고 싶었던 소녀가 새긴 것일테고, 자동차가 너무 갖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이 그런 떡살로 남았을 것이고, 민무늬떡살은 살아생전에 너무 불효를 했기에 부모님께 아무 할 말이 없다는 자식의 자책을 담은 제사용 떡살이에요. 그러니까 떡살은 그냥 무늬가 아니라 편지였어요."
떡에 꼭꼭 눌렀던 무늬마다에 이렇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들어있다고 풀이하는 사람, 그러니 절편에 무늬를 찍는 떡살은 그냥 보기 좋은 문양을 찍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가슴 속 염원을 새기는 틀이라고 말하는 이가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떡살 명장 담양 대치 목산공예관의 김규석(52) 관장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사이에는 태극기 문양 떡살들이 많습니다. 미 군정기에는 'happy day'라는 영문 떡살도 있었어요. 기본적으로야 삼다(三多), 즉 오래 살고, 잘 살고, 자식 많기를 바라는 염원을 떡살에 새기고, 벽사, 화목, 사후세계에 대한 평안함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소박한 마음들도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떡 위에라도 태극기를 새기고 팠던 이는 누구였을까. 학교라는 글자를 떡 위에 눌렀던 소녀는 학교에 가보기는 했을까. 떡살에 마음을 새겼던 이들의 삶을 짐작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화끈거린다. 지금보다 훨씬 배가 고픈 시절이었음에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떡을 빚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칼로리를 따지고 원산지를 골라먹는 정도에 그치는 지금 배부른 시절의 음식문화가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진다.

ⓒ 최성욱

ⓒ 최성욱

ⓒ 최성욱


이연채 할머니 집에 동동주 마시러 다니다가 본 떡살이 계기
"쌀로 만든 음식을 중국에서 '시'라고 하거든요. 시루라는 말도 거기에서 온 말이죠. 그냥 쌀가루를 쪄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떡이 시루떡이고, 떡을 찐 다음에 다시 쳐서 좀더 쫀득쫀득한 맛을 내는 것이 인절미지요. 찌고 쳐서 만든 떡에 무늬를 새겨 넣은 떡이 절편이에요. 절편에 무늬를 찍는 판이 떡살인데, 굉장히 다양해요. 그런데 제대로 정리된 책자 하나가 없데요."
그의 말대로 창살이나 기와문양, 도자문양 등에 대한 정리와 기록은 있어도 떡살의 영역은 숨겨진 것이나 다름없다. 1972년에 일본에서 한국떡살에 대한 책자 하나가 나왔고 1973년에 부산에서 떡살을 만들었던 김길성씨가 자료정리를 해놓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들 자료집도 체계화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문양들과는 달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문양이 떡살이고, 생활감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문양이기에 그 가치가 각별한데도 떡살에 대한 연구 자체가 깊이 있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는 함평이 고향인데 제 할아버지가 나무를 잘 다루셨어요. 할아버지 영향으로 저도 어려서부터 나무를 잘 다뤘죠. 공부를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경기도의 이름난 풍속조각가 이주철 선생 밑으로 들어가서 나무조각을 기초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열심히는 했지만 보람을 느끼지는 못했다고나 할까요. 외형을 따라 새기고 하는 일에 그닥 매료되지가 않았어요. 그러다가 광주로 내려와서 이연채 선생님을 만났죠. 저보고 떡살을 하라고 하시기에 처음에는 털어버렸어요. 내가 떡살이나 깎으려고 조각을 배웠냐고 하면서."
20대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남도음식의 살아있는 역사였던 이연채 할머니 집에 동동주를 마시러 다니다가 할머니가 만드는 떡살을 보았다. 1985년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거부를 했지만 떡살에 끌렸다.

▲ "틈나면 공부하고 틀어박혀서 나무나 만지고 사니 친구들은 저한테 재미없게 산다고들 하죠. 그런데 재밌게 사는 길은 모르겠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저한테 편한 게 뭐냐 하면 알아야 편하더라고요. 모르면 안 편해요."
ⓒ 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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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살 천 개를 만들려면 20년을 잡아야겠더라구요"
"기능적으로는 단순한 음각이죠. 그런데 공부를 안하고는 못 깎겠더라구요. 음양오행사상, 명리풍수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시중에 나와 있는 민화집은 거의 모조리 사들였어요. 틈나면 공부하고 틀어박혀서 나무나 만지고 사니 친구들은 저한테 재미없게 산다고들 하죠. 그런데 재밌게 사는 길은 모르겠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저한테 편한 게 뭐냐 하면 알아야 편하더라고요. 모르면 안 편해요. 이게 무엇인 줄을 알아야 제 맘이 편해져요. 모르면서 하는 일이 불편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서 이렇게 산 거죠."
모르고 하는 일이 불편했다. 작은 절편에 박힌 염원들의 의미를 알면 알수록 일이 더 편하고 힘이 났다. 일하는 짬짬이 골동품 가게들을 찾아다니고 박물관에 찾아갔다. 전통문양에 관련된 것들은 탁본을 해두거나 자료를 구하기 시작했다.
"워낙 맥이 끊겨있던 분야라 우리 떡살의 기본을 체계화하려면 최소 천 개 정도는 떡살을 만들어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떡살 하나를 만드는 데 최소 일주일이 걸리거든요. 천개를 만들려면 20년을 잡아야겠더라구요. 그래서 20년을 잡고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20여 년을 계획 잡고 만든 떡살들은 2005년 《소중한 우리 떡살》(미술문화 펴냄)이라는 책으로 담아냈다. 책을 엮어내고 나니 전통음식관련자나 전통문화연구자들뿐 아니라 벽지업체나 디자인업체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문화산업과도 소통이 되는 것이 문양이기 때문이었다.
"전통음식이 재조명되던 90년대 후반기에는 떡살이 잘 팔렸어요. 만들면 바로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죠. 하지만 2000년도부터는 중국산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국적불명의 문양들이 마구잡이로 절편에 찍히고 있는 형국입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막 찍어서 만드는 거죠. FTA만 무서운 것이 아니에요. 해마다 콘테이너로 엄청난 떡살이 들어와서 우리 제사상에 올라가는 절편에 무늬를 찍어내는데 그0걸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다는 게 심각하게 생각 안되십니까? 차라리 아무 것도 안찍던지, 이 시대의 염원을 담으면 모를까 우리 문화가 완전히 번지 없는 주막이 돼버렸어요."

ⓒ 최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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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화판․시전지판 등 생활 속 다양한 문양 재현작업도
기능을 익히기보다는 의미를 좇아서일까. 고집스런 장인보다는 절개 있는 선비 같다. 20년 공을 들여 떡살재현의 과업을 마치자마자 그가 매달리는 작업이 또 있다. 생활 곳곳에서 쓰였던 다양한 문양들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능화판이라고 있거든요. 책표지를 만들 때 썼던 나무문양이에요. 시전지판은 선비들이 편지지를 만들던 목판입니다. 주로 매화나 난이 그려져 있는데 오방색 먹을 판에 묻혀서 찍어내면 아름다운 편지지가 됐죠. 연애편지를 쓸 때 꼭 시전지판이 필요했겠지요. 보판은 천에 찍는 목판인데 옷을 만들 때 무늬를 집어넣는 데 쓰였죠. 무늬를 언어처럼 사용했던 시절이라 문양들이 멋이 대단합니다."
주로 18~19세기에 생활에 쓰였던 인쇄기술들을 재현하고 있다. 더불어 이 시대의 정서를 담은 새로운 떡살도 만들어내고 있다. 계사년인 2013년을 목표로 삼은 계획이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가 봐요. 내일 일도 모르는데 어떻게 십년 이십년씩을 내다보며 나무와 씨름을 하느냐고 해요. 하지만 어쩝니까. 저는 미련한 사람이에요. 공부하면서 하나씩 만들어 갈 수밖에 없잖아요. 세월의 검증을 거쳐서 남은 문양들이야 재현이 더 쉽지만 세월 속에서 사라진 것들의 기법과 의미를 찾아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이라며 떡살에 새긴 의미를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그를 만나고 나니 갑자기 우리시대가 불편하고 옹색하게 느껴진다. 알지 못하는 무늬를 마구잡이로 찍어 떡을 빚고, 알지 못하는 음식조차도 '얼마짜리'로 등급을 매겨 가치를 정하는 이 시대를 어찌 진정 더 편한 시대라 할 수 있으랴.

ⓒ 최성욱

출처 : 글이 있는 갯마을
글쓴이 : 갯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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